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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경제위기와 중앙은행의 반응

대공황 당시 중앙은행의 금리 인상 결정의 배경

by 피터까똘 2025. 2. 17.

오스트리아 중앙은행
오스트리아 은행의 모습

 

 

 

 

   대공황(1929-1939)은 현대 경제사에서 가장 심각한 금융 위기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당시의 중앙은행 정책 결정이 경제 위기를 더욱 심화시켰다는 점에서 많은 논란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경제 위기 상황에서는 금리를 낮추어 경기 부양을 유도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지만, 대공황 당시의 여러 국가들의 중앙은행은 오히려 금리를 인상하는 상방 된 결정을 내렸는데, 이러한 정책이 나온 배경과 그로 인한결과를 분석함으로써, 현대 금융 정책에 주는 교훈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목차 : 1.중앙은행의 금본위제와 통화 정책의 제약

          2.대공황 초기 중앙은행의 정책 오류

          3.중앙은행의 금리 인상과 금융 시스템 불안으로 인한 은행 폐쇄

          4.1930년대 후반의 중앙은행의 정책 변화와 교훈

 

 

 

 

[1.중앙은행의 금본위제와 통화 정책의 제약]

   1920년대와 30년대 초반 대부분의 국가들은 금본위제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금본위제는 화폐 가치를 금과 연동시키는 시스템으로, 이에 따라 각국의 중앙은행은 통화량을 금 보유량에 맞추어 제한해야 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대공황 초기에, 금융 시장의 혼란과 신용 경색으로 인해 각국의 금 보유량이 감소하면서 대대적인 통화량 축소 압력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중앙은행들은 금 유출을 막기 위한 방법으로 금리를 인상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습니다. 특히 영국이 1931년 금본위제를 포기하면서 미국과 프랑스는 자국의 금 유출을 막기 위해 더욱더 공격적으로 금리 인상 정책을 펼쳤고, 이러한 정책은 통화 긴축을 초래하여 경기 침체를 더욱더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국은 1차 세계대전 동안 전비 조달을 위해 금본위제를 일시 중단했다가 1925년 원스턴 처칠의 결정으로 금본위제로 복귀했으나 문제는 전쟁 전의 금 가치를 유지하려던 것이 파운 드화가 과대평가되고 이러한 상황에서 대공황이 시작되어 영국은 석탄철강조선업이 침체 하고 실업률이 급등한 가운데 금본위제로는 통화량을 조절할 유연성이 없어지므로 영란은행 (Bank of England)에서 금 유출이 심각해져서 결국 금본위제를 포기하여 파운드화는 가치 하락을 하고 영국의 수출 경쟁력은 높아지는 효과를 낳아 경기 부양에 성공할 수 있었음. 영국의 금본위제 포기는 대공황 시대의 경제적 흐름을 바꾸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2.대공황 초기 중앙은행의 정책 오류]

   미국의 연방준비제도(Fed)1929년 증권시장 붕괴 이후에 은행 시스템을 안정화시키고 유지하는 데 실패하게 됩니다. 당시에 연준은 인플레이션을 우려하여 1928년부터 점진적으로 금리를 인상하고 있었던 상황으로, 이는 금융 시장의 유동성을 크게 위축시켰습니다. 그런데, 1929년 대공황이 시작된 후에도 연준은 통화량 확대보다 금 보유량 유지에만 집착을 하여서 그 결과로 대량의 은행들이 파산하는 결과를 발생시켰습니다.

   프랑스의 중앙은행 역시 1920년대 후반 금 보유량을 급격히 증가시키면서 글로벌 유동성을 흡수했었으나 이는 전 세계적으로 신용 경색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어서, 국제 금융 시장의 불안을 가중시키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결국 프랑스는 자국의 금 보유량을 방어하기 위해 금리를 유지하는 정책을 펼치고, 이는 경기 회복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습니다.

 

 

 

 

[3.중앙은행의 금리 인상과 금융 시스템 불안으로 인한 은행 폐쇄]

   금리 인상은 단순히 경기 위축만 초래한 것이 아니며, 은행 시스템 자체의 불안을 심화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대공황 당시 미국에서는 1930년부터 대규모 은행 폐쇄가 이어졌는데, 당시 연준은 지급준비율을 더욱 높이고, 부실 은행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지원을 제공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결과로 은행 간 신뢰는 급격히 하락하고, 예금 인출 사태(bank run)만 빈번하게 발생하도록 했습니다.

   특히 1931년 오스트리아의 크레디트안슈탈트(Credit-Anstalt) 은행의 파산은 유럽 금융 시장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에 따라 독일, 영국 등 주요 국가들은 금융 불안이 확산되었으며, 각 국의 중앙은행들은 외환시장을 방어하기 위해 다시금 금리를 인상하는 악순환을 반복했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실물 경제의 급격한 위축을 가져왔으며, 대량 실업과 기업 도산을 야기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크레디트안슈탈트 은행은 1855년 로스차일드 가문에서 설립한 중앙유럽 최대의 은행으로 산업 및 금융 투자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929년 오스트리아의 방크 페어라(경쟁은행)를 인수하였으나 방크 페어라의 부실 자산으로 부채가 급증한 상황에서 대공황이 시작되어 심각한 유동성 위기에 빠져서 1931511일 도산을 공식발표하게 되었고 이것은 오스트리 아 독일 영국으로 이어지는 연쇄 금융위기를 촉발하여 대공황을 더욱 심화시키게 되었음.

 

 

 

 

[4.1930년대 후반의 중앙은행의 정책 변화와 교훈] 

   1933년 미국은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경제 정책의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금본위제를 부분적이나마 폐지하고, 뉴딜 정책을 통해서 정부의 지출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경제 회복을 도모했습니다. 이에 따라서 연준 역시 1933년 이후 금리를 인하하고 통화 공급을 늘리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하면서 경기 부양을 시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정책 변화는 금융 시스템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미국 경제가 점진적으로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대공황이 심화된 주요 원인의 하나가 중앙은행의 금리 정책 실패였음이 명확해졌습니다. 이후 20세기 후반부터 중앙은행들은 경기 침체 시 적극적인 통화 완화 정책을 펴는 방향으로 정책 기조를 수정하게 되었습니다.

 

 

 

 

 

 

대공황 당시 중앙은행의 금리 인상은 경제 위기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는데, 금본위제의 제약과 금융 시스템의 불안이 결합되면서, 당시의 정책 결정자들은 하나같이 경기 부양보다는 금 보유량 방어에만 더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러한 결과로 통화 긴축이 심화되었고, 이는 금융 시장의 붕괴와 실물 경제 침체로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례는 오늘날 중앙은행이 경기 침체 시 적극적인 금리 인하와 유동성 공급 정책을 펼치는이유를 설명하는 중요한 교훈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또한, 금융 시스템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것이 단순한 금리 조정보다 훨씬 더 중요한 요소임을 시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공황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대의 경제 정책들은 보다 신속하고 유연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점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습니다.

 

 

 

 

 

 

 

< 다음 포스팅은 대공황에서 중앙은행의 역할과 그 한계입니다.

To Be Continu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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